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처드 닉슨 (문단 편집) === 개관 ===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한 것으로 많이 각인되었지만 재임기 외교, 경제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베트남전 개입 중지와 [[냉전]] 완화와 데탕트 등 한국전쟁 후 가장 괄목할만 한 치적을 남긴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가로서 권력을 남용하고 거짓말을 하다가 불명예스럽게 사임을 했기에 닉슨은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에서도 낮은 평가를 받는 대통령이었다.[* 그 이전에 나온 대통령 5명(32대 [[프랭클린 루스벨트]]부터 36대 [[린든 B. 존슨]]까지.)은 모두 10위안에 드는 평가를 받았으며, [[대공황]] 당시 대통령이었던 [[허버트 후버]] 이후 10위안에 들지 못한 대통령이 되었다. 덤으로 후버도 하위권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도 [[1990년대]] 들어서는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빼고 [[중국]]과의 수교 등으로 냉전에 [[데탕트|해빙기]]를 가져오게 한 외교적 성과 덕분에 평가가 올라가고 있는 추세다. 경제사적 측면에서는 2차 세계대전 후 세계 경제의 근간이었던 [[금본위제도|브레튼우즈 체제]]를 [[닉슨 쇼크]]로 중단시킨 장본인이 되버렸다. 즉 [[1971년]] [[8월 15일]]을 기해 [[미국 달러]]의 금태환을 거부하고 [[미국 달러|USD]] 자체를 본위화폐(기축통화)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닉슨이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인 1960년대 중반부터, [[린든 B. 존슨]]의 대표적인 사회복지정책인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를 포함한 각종 복지 프로그램들과 [[베트남 전쟁]]에 들어가는 엄청난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이미 금본위제를 무시하고 달러를 찍어내고 있었다. 그러자 이를 감지한 서유럽에서 국채 변제를 달러 대신 금괴로 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를 상환할 능력이 없던 미국은 결국 금본위제를 폐지할 수밖에 없었다. 즉 브레튼우즈 체제를 중단하는 것은 불가피한 결정으로, 이를 닉슨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억울하다고 봐야할 것이다. [[파일:0013729e4771107f0d5c5c.jpg]] 1972년 2월 중국 방문에서 [[마오쩌둥]]과 접견하는 모습. 이 사진은 1970년대 [[데탕트]] 시대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남았다. 이 때문에 워터게이트 사건과 별개로 냉전시대사에서 닉슨과 그를 뒷받침했던 키신저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당시 닉슨의 중국 방문은 골수 [[반공주의]]자로 유명했던 그가 공산진영 지도자와 회동, 관계개선을 모색하려 했다는 점에서 더욱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닉슨 중국에 가다"(Nixon goes to China)'''라는 말은 특정 정치지도자가 그동안의 이념적 선호도와 상반되는 뜻밖의 정책적 선택을 하는 경우, 특히 오랜 적대세력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려는 것을 비유하는 관용 문구가 되었다.[* 1980년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불렀던 로널드 레이건이 임기 후반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함께 핵 군비감축에 합의하는 등, 화해 모드로 돌아섰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닉슨의 중국과의 접선은 전통적으로 기민한 외교 정책이자 소련에 빅엿을 먹인 전환적 발상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비록 소련이 이미 망한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닉슨의 대중국외교가 박한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이건 중국의 경제력이 신장된 21세기 기준에서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비판이고,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이었을 때에는 전혀 상황이 달랐다. 당시 소련이 소비재 공급이 부실하다는 평이 있었을지언정 엄연히 세계 2위 군사강국에 경제대국이었고, 1인당 국민소득도 서방선진국 만큼은 아니라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반면 중국은 경제적인 잠재력이 높다는 평가는 있을지언정,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대에 그쳤던 낙후된 후진국이었다. 막말로 당시 소련에서 주말이나 휴가철에 자기 소유 별장에서 여가를 보내는것이 일상적이었던데 반해 중국은 라디오와 자전거가 사회인의 상징이었던 시절로, 당연히 당시 시점에서는 소련 견제가 우선인게 당연할수밖에 없었다. 1929년 시작되어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1965년 본격 도입한 노인의료보험([[메디케어]]), 주정부의 빈민부조([[메디케이드]]) [[의료보험]] 제도를 완전 폐지했다는 오해를 사고 있는데[* "백악관 자문 존 에릭먼이 의료서비스를 적게 제공하는 만큼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를 만들면 알아서 적게 공급할 것이라며 이 제도를 제안했고, 닉슨이 좋다고 해서 통과됐다"는 견해다. [[http://wspaper.org/article/14816|#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의 주장]]], 이는 사실과 다르다. 두 보험은 멀쩡히 잘 남아있으며, 도리어 닉슨은 "1973년 12월,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만들어낸 HMO(Health Maintenance Organization Act of 1973)를 서명을 함으로써 양당통합을 이끌어낸 성과가 있다." [[http://quidproquo.egloos.com/5293103|# 링크]] 닉슨은 "모두 3억 7천만 달러에 이르는 기금을 HMO 가입 확대를 위한 기금으로 조성하고 선불정액제 보험을 금지하는 주들의 법률들을 무효화하였으며, 25명 이상 노동자를 고요하고 있는 기업 중 의료보험 급여를 하고자 하는 기업은 반드시 HMO를 선택사항 중 하나로 포함하도록 하였다." [[http://pleko.egloos.com/1155327|# 출처]] 이런 오해의 주된 이유가 마이클 무어의 [[식코]]에서 닉슨이 해당 발언을 하는것처럼 나오기 때문이다. HMO의 특징은 일반의 네트워크 내에서 저렴한 보험을 쓸 수 있게 한 것으로, 대신 전문의를 사용할 경우 비용이 증가하게 된다.[* 비슷한 경우로 PPO(주치의 중심)이 있다. HMO는 1980년대 중반부터 2000년까지 성장하다가 이후 PPO, CDHP(소비자 주도 건강플랜), EPO(전속의 플랜) 등이 등장하면서 비율이 줄어들었다. [[https://books.google.co.kr/books?id=12WHnpOfE_oC&pg=PT293&lpg=PT293&dq=%EB%8B%89%EC%8A%A8+HMO+%EB%B3%B4%ED%97%98&source=bl&ots=U1VA8haGxt&sig=mxXuGkAD4ET-P_dtONrTQyqaVUg&hl=ko&sa=X&ved=0ahUKEwjV0KfU7u3NAhWEEpQKHXL_BSIQ6AEIRTAG#v=onepage&q=%EB%8B%89%EC%8A%A8%20HMO%20%EB%B3%B4%ED%97%98&f=false|# 건강보험의 진화와 미래, 보건미래포럼]] HMO는 초기엔 비영리였지만 이후로 영리 HMO가 늘어나면서 우리가 아는 그런 문제들이 발생하는데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도 있다. 닉슨이 후대의 문제의 책임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 이는 개인이 가입을 선택하는 보험으로, 뒤를 이은 [[지미 카터]]는 1976년 포괄적 의료보험제도를 주장했으나 통과되지 못했다. 닉슨은 레이건 이후의 공화당과는 정책노선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닉슨은 대통령으로 모셨던 아이젠하워, 자신의 부통령이었던 포드, 그리고 그 부통령으로 재임한 [[넬슨 록펠러]]로 이어지는 공화당 [[온건주의]] 라인의 대표주자였고, 레이건은 [[로버트 A. 태프트]]를 중시조로 하여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나온 [[배리 골드워터]]로 이어지는 공화당 보수 강경파 라인이다. 참고로 넬슨 록펠러는 십수년 동안 뉴욕 주지사를 지낸 인물로 바로 그 록펠러 가문 출신이다.] 예를들어, 닉슨은 환경주의자로, '[[환경]]보호', '환경의식', '[[생태학]]'이란 단어를 미국 정치계에 들여놓은 초기 인물 중 하나가 닉슨이었다. [[1969년]] 국가환경정책법(National Environmental Policy Act)을 제정, [[1970년]]에 환경보호청(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과 환경개선위원회(Council of Environmental Quality)를 창설했으며, 같은 해 대기정화법(Clean Air Act)을 확장했고, 1972년에는 수질오염방지법(Federal Water Pollution Act)을 대폭 개정했다. 다만 닉슨이 이러한 환경주의적 정책을 편 것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는 거리가 멀다는 분석이 있다. [[버지니아 대학교]] 산하의 [[싱크 탱크]]로, 대통령 리더십과 공공정책, 그리고 미국 정치사를 연구하는 기관인 [[https://en.wikipedia.org/wiki/Miller_Center_of_Public_Affairs|밀러 센터]]에 따르면, 닉슨은 사석에서 '''만약 내가 이러한 조치를 하지 않았더라면, 민주당이 장악한 의회에서 더욱 진보적인 입법을 강행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닉슨은 [[케인즈주의]]적인 임금과 가격 통제정책들을 추진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정책 프로그램들 또한 자신의 정치철학과 상반되는 것이고 또 장기적으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 당해년의 일시적인 효과를 위해 실행했다고 한다. 궁극적으로 닉슨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루스벨트]]가 구축한 뉴딜동맹을 극복할 [[우파]] 진영의 정치적 동맹을 구축하고자 했다고 한다. 닉슨은 이를 통해 미국을 우측으로 이동시키고자 했고, 결국 그걸 해냈다는 것이다. [[https://millercenter.org/president/nixon/impact-and-legacy|#]] 닉슨과 레이건을 비교했을 때, 오늘날 미국인들의 평가는 물론 역사학자들도 닉슨보다 레이건을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하는데, 그것은 레이건 스스로가 닉슨의 지나친 권력남용과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해서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측면에 있어서 철저한 단절과 극복을 꾀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자회견과 언론인 간담회를 기피했던 닉슨과 달리, 레이건은 유창한 언변을 앞세워서 대국민소통에 매우 능했다는 점이 성패를 갈랐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둘은 닉슨이 대통령이고 레이건이 주지사일 시절 통화를 나누기도 했는데, 이 통화에서 닉슨은 [[인종차별|아프리카인들을 원숭이라고 부르는]] 레이건의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세계적인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닉슨과 [[보수당(영국)|보수당]] 소속의 전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이 상당히 유사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https://www.economist.com/britain/2019/10/03/boris-johnson-britains-richard-nixon|#]] [[마약과의 전쟁]]을 시작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이 정책의 폐해는 항목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